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콩 영화 (문단 편집) == 침체의 원인 == 홍콩 영화는 1980년대 후반에 연 제작편수가 200편을 넘어갈 정도로 정점을 찍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기나긴 침체기에 들어섰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관객수는 6,000만 명[* 1인당 영화관람횟수가 10회를 넘었다는 얘기이다. 1980년대 당시 홍콩의 영화 산업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알 수 있는 척도이다.]을 초과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급속히 하락세를 겪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는 연간 관객수는 2000만명대 아래로 추락했다. 홍콩 영화의 점유율도 1992년 홍콩 영화의 매출은 15억 달러에 이르렀으나, 이듬해에는 11억 달러로 폭락했다. 일부 유튜버들이나 논평가들은 [[홍콩 반환]]을 주요 원인으로 들고 실제로 [[홍콩 반환]] 몇 년 전부터 홍콩 영화는 아류작이나 도박물이 계속 나오면서 자국민들로부터 외면 받으며 쇠락해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중국 당국의 홍콩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간섭은 '''2010년대 부터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홍콩 영화의 몰락은 중국당국보다는 홍콩영화 자체의 문제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홍콩 영화는 아래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리즈시절]]을 길게 가져가지 못하고 못하고 망해버린 것이다. 큰 예시로 해외 영화제 수상 경력만 봐도 알 수 있는데, 홍콩 영화는 [[왕가위]]가 1997년 [[해피 투게더(1997)|해피 투게더]]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처음으로 세계 3대 영화제에 등판했지만 중국 영화는 10년이나 앞선 1988년부터 [[장예모]]를 시작으로 [[천카이거]] 등의 감독들이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고 있었다. 즉, 홍콩 반환의 문제뿐만 아니라 홍콩 영화의 질적인 저하가 심해 발전이 없었기에 자멸한 측면도 있다. 1980년대부터 홍콩 영화를 봐왔던 팬이라면 이미 이미 중국에 홍콩이 반환되기 이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는 홍콩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한 경우가 별로 없다는 것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즉 1991년에 나와 서울 관객 43만을 끌어들인 [[황비홍]]과 1992년과 1993년에 개봉하여 각각 26만명, 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신용문객잔'과 '동방불패 2'가 한국에서는 거의 마지막으로 흥행한 홍콩 영화다. 한국 영화에 큰 영향을 끼친 《[[중경삼림]]》(1995)조차 서울 15만 명으로 제대로 흥행하지 못했다.[* 1994년 홍콩 현지에서도 흥행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동사서독]]과 흥행스코어가 비슷했다.] 이제 한국 시장에서 홍콩 영화가 돈이 안되기에 홍콩 현지에서 개봉해도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단관 상영관에서 상영 할 까 말까 할 정도이다. 이 외에는 중국 관련 케이블 채널이나 '아시아 TV'같은 중화권 드라마 및 영화 전문 채널 혹은 [[넷플릭스]], [[왓챠]] 같은 OTT나 VOD 에서밖에 볼까 말까 할 상황이다. 과거 국내 TV나 영화 잡지[* 한국은 영화잡지라고 해봤자 '씨네21'이 유일하고 '[[스크린]](1984년 창간해 2011년 폐간)'이나 '로드쇼(1989년 창간해 1998년 폐간)', 월간 [[키노]](1995년 창간해 2003년 폐간),월간 프리미어(1995년 창간해 2009년 폐간),필름 2.0,무비 워크 등도 폐간했다. 같이 홍콩영화나 홍콩배우들의 비중이 많았던 월간 잡지는 10여 년 전에 폐간되었다.]에서 손 쉽게 접할수 있었던 홍콩 배우들 관련 소식은 트위터나 웨이보, 인스타그램에서 밖에 알 길이 없다. 그와 반대로 한국 영화는 홍콩 영화가 리즈시절을 달리던 1980년대~1990년대에는 계속 침체기였고 1990년대 중후반에도 점유율이 20%대에 머물 정도였지만, 1999년 《[[쉬리(영화)|쉬리]]》의 대성공을 기점으로 점유율이 크게 상승하면서 [[르네상스]]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또한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영화인들의 세대 교체와 더불어 영화 산업이 선진화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해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기점으로 그동안 변방의 나라로만 취급받아오던 한국이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하부에 기재한 것과 같이 외국에서도 인정 받을 정도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들어내면서 아시아 영화 중심지를 홍콩에서 한국으로 옮겨오고 있었다.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지 못한 홍콩은 중국반환과 맞물려 고인물만 양산하다 보니 자연스레 침체와 몰락의 과정을 겪게 된 셈이다. 침체기에서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 한국 영화계에서 격언처럼 나돌았던 말이 "내부적인 문제로 망해버린 홍콩 영화계와 일본 영화계를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말이었다. 그만큼 홍콩 영화계에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교의 적절한 예가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판에는 이런 저런 자본이 흘러들어 1980-90년대 긴 침체를 딛고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친구(영화)|친구]]》가 성공하자[* 다만, '친구'는 조폭미화물이 아니다. 오히려 동시기에 나온 [[달마야 놀자]], [[조폭 마누라]], [[두사부일체]]같은 작품들이 연이어 히트를 치는 것이 문제였다.], 여러 양산형 [[조폭미화물]]들이 유행하면서 괜찮을까라는 우려가 상당히 많았다. 다행히 이러한 우려는 2003년에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올드보이]]》,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 [[김지운]]의 《[[장화, 홍련]]》 등의 "[[웰메이드]]" 작품이 나오면서 나오면서 불식된다. 이후 한국 영화에서 조폭 미화물은 숫자가 확 줄어들면서 몰락해버린다. 홍콩 영화 침체의 대략적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꼽을 수 있다. 1997년 반환 전에 중국 베이징 TV에서 제작 방영한 홍콩 영화 특집 프로그램에 당시 홍콩 영화와 [[대만 영화]]판에 영향력을 끼친 배우와 감독 20여명이 출연하였는데 첫번째와 두번째 이유를 많이 언급하면서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어도 홍콩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제작되는게 아닌 작품성과 배우의 연기를 중시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 배우들의 지나친 겹치기 출연 - 홍콩 영화가 전성기였을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당시 주연급인 주윤발, 장국영, 장만옥 등등은 일년에 4-5편, 많게는 10여편 가까이 [[다작]]을 하고 있었다. 가령 주윤발이 전성기였던 1987년과 1988년에 출연한 영화는 각각 8편이다. 당시에 암흑기였던 한국 영화판에서조차 주연급이 1년에 한두 편 출연하는 정도였으니, 홍콩 배우들의 이미지 소비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다작 자체는 본인의 연기력이나 체력만 된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출연하는 영화들에서의 이미지가 다 같을 수 없고, 특히 믾이 출연하면 할수록 분명히 이미지의 충돌이 생기는 캐릭터의 배역이 안 나올수 없다. 이러면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해당 배우가 연기한 캐릭터와 그 배우가 최근에 출연한 다른 영화에서의 캐릭터가 혼동되어 제대로 몰입을 할 수가 없다. 만일 겹치기 출연인데도 캐릭터의 변화가 전혀 없다? 그러면 원 영화의 아류작에만 계속 나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다 홍콩 배우들은 [[멀티 엔터테이너|만능 엔터테이너]] 노릇을 해야 했다. 물론 연예계에서 이렇게 활동 영역이 겹치는 경우야 흔하지만, 홍콩 연예계는 이 정도가 상당히 심해서 배우들이 원래 가수 출신도 많았지만 가수나 예능 진행자, CF 모델로 계속 나왔다. 가창력이 의문인 주윤발조차도 음반을 냈을 정도였다. 그래도 성룡은 짬밥이 많은 경극 배우 출신이었던지라 가창력이 아주 꽝은 아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 A]], [[폴리스 스토리]] 등의 초기 성룡 작품은 대부분 주제가를 성룡이 직접 불렀다. 이렇게 TV를 틀면 365일 24시간 계속 나오는 홍콩 배우들은 결과적으로 영화배우로서의 이미지 소모를 가속화했고, 점점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킨 셈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작품성은 고사하고 연기조차 성의 없는 졸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다른 나라에 배포되면서 한때 홍콩 영화에 열광했던 외국인 관객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홍콩은 시장이 좁기 때문에 외국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무덤을 판 것이다. 이 사실은 1992년~1993년 당시 홍콩 톱 배우들의 영화 출연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한해 영화 출연편수가 10편이 넘어가는 배우도 속출했다. 이런 이유는 특이한 계약방식 때문인데, 당시 배우가 어느 한 편의 작품을 계약하면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최대 4편의 작품을 연속적으로 계약하는 방식으로 계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식의 작품들이 작품성이 좋을리가 없었고 배우들도 작품에 대한 시놉시스조차 모르고 작품에 출연했다. 때문에 억지로라도 연기 할 수 밖에 없었기에 아무리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해도 '저게 무슨 연기야?'라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수준 낮은 연기력을 보여준 배우들이 수두룩 했다. 이런 경우는 과거 6,70년대에 활동한 우리나라 배우들 중에서 한해 출연작이 10편 넘어가는 배우가 많았던 것과 똑같다. 이 같은 현상은 잘 나가는 감독도 예외가 없었다. [[서극]], [[왕정]] 감독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그나마 서극 감독은 황비홍 시리즈와 동방불패 시리즈, 청사 같은 평작 이상의 완성도를 보인 작품을 만들었지만, 왕정 감독은 이 시기부터 최악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 [[아류작]]의 난립 - 《[[영웅본색]]》이 히트하자 비슷한 홍콩 느와르물이 쏟아져 나왔고, 《[[천녀유혼]]》이 성공하자 역시 이와 흡사한 아류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도박 영화가 히트하자 도박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강시 영화가 히트하니 이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가 이런 아류작에도 [[주윤발]], [[왕조현]] 등 원조격 영화에 출연한 스타들이 나오면서 단기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해진 면이 있으나, 장기적으로 배우의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버렸다. 황혼기에는 아예 도박물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고, 《[[팔선반점의 인육만두]]》가 성공한 이후에는 인물과 스토리만 바꾼 비슷비슷한 폭력적인 공포물 아류작들이 무더기로 만들어졌으며, 적나고양 시리즈 같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강간물들이 시리즈로 계속 나왔다. 이런 아류작 난립의 원인 중 하나로, 위 투자 감소와도 연관이 있는데 투자가 감소하기 시작하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거나 제작비를 많이 투입하여 볼거리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그저 과거에 히트했던 작품의 후광에 기대어 아류작이나 찍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아류작이 범람하다보니 홍콩 영화계는 잘 나갈 때에도 나오는 영화 장르들의 대부분이 맨날 범죄 영화나 무협 영화들밖에 없었고 관객들로선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삼합회]] 및 조직폭력배의 영화산업 개입 - [[임화수]]를 비롯한 여러 조직폭력배들이 입김을 행사하던 한국 영화계의 상황과 유사하게 홍콩 영화계도 삼합회를 비롯한 여러 범죄조직들이 영화산업은 기본이고 연예계 전반의 패권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주성치]], [[홍금보]], [[왕우]] 등의 홍콩 중견 배우들은 삼합회 간부설 혹은 영화계와 삼합회를 잇는 중간다리 역할이라는 설이 끊임없이 돌고 있었다. 배우들에게 폭력으로 영화 출연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여배우들에게는 [[성상납]]을 요구하거나 혹은 노출 때문에 출연을 꺼리는 에로 영화 같은 영화에 출연을 강요했다는 설도 많았다. 이런 설들은 다 [[카더라]]고 속성상 진위를 밝히기가 쉽지 않지만, 실제로 불거진 사건도 있다. [[양가휘]]는 영화 '연인' 촬영 초반 당시 [[화소도]]라는 영화에 강제로 출연했어야 했는데, 화소도 출연을 거절하고 '연인' 촬영에만 전념하려고 하자 본인은 필리핀에 납치되어 감금되고 가족들도 삼합회에 감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그의 아내가 담판을 지어 '연인' 촬영이 끝나면 '화소도'에 출연하겠다고 하여 해결이 되었으나, 양가휘는 삼합회 조직원들과 베트남 현지 군인들에 의해 대만까지 끌려가 영화 촬영을 강행해야 했다.[* 1997년 1월에 출연한 토크쇼에서 양가휘는 이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조폭들에게 끌려다니며 촬영하느라 너무 지쳐버려 홍콩 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에게 전화하면서 울음을 터트렸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또한, [[양조위]]의 연인인 [[유가령]]이 삼합회에 납치되었다가 영화 출연을 강요하기 위해 협박성 누드사진을 찍히고 풀려난 사건이 유명하다. 이 사진들은 2014년에 삼류 찌라시를 통해 세상에 공개되었고 양조위와 결혼한 유가령은 진상을 밝히는 고통스러운 기자회견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유명 연예인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서라도 폭력조직과의 연줄이 있어야만 했다. 한국에는 잘 안 알려진 사건이지만, 1992년 [[매염방]]은 한 폭력조직으로부터 출연 거부에 대한 보복으로 인해 구타를 당했는데, 매염방의 뒤에 있던 다른 조직이 보복으로 매염방을 폭행한 조직원들을 살해한 바 있다. 이렇게 1960-70년대의 한국 연예계와 마찬가지로, 홍콩 영화의 정점기에서도 홍콩 배우들의 매니지먼트는 대부분 삼합회 조직이 담당하고 있었고, 홍콩 영화 자본은 대부분 삼합회에서 흘러나오는 지저분한 검은 돈이었다. 위에서 나온 잦은 겹치기 출연이나 아류작 남발도 사실 삼합회 탓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삼합회 조폭들은 연예 매니지먼트에 합리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연예인들의 이미지 소모나 피로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화계에 투자한 금액을 빨리 회수하기 위해 아류작을 계속 만들고 여기에 연예인들을 계속 이미지 소모를 가속화하는 작품들만 출연시킨 것이다. 문제는 2020년대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 * 중국 개방의 본격화로 투자 감소 - 1980년대 홍콩 영화에 투자금이 몰리게 된 원인은, 아직 사회주의 통제 경제 체제였던 중국으로 가는 투자금이 홍콩을 경유했기 때문에 홍콩에 자금이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중국이 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개방되고 자본주의화가 됨에 따라 해외자본은 중국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었고, 홍콩을 경유하는 자금은 줄어들게 된다. 이렇기 때문에 홍콩 금융 시장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영화판으로 흘러들어가는 자금도 줄어들었다. 이러한 투자 감소 때문에 또 삼합회가 제작에 간섭하는 원인을 제공해 돈벌이를 위한 아류작들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홍콩 자체에서 투자받기가 힘들어진 상태인지라[* 작은 영화나 독립영화 조차 홍콩 자체에서 해결하기 힘들어졌다.], 중국 투자자를 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다 보니 홍콩배우들 대부분이 친중 성향을 보일 수 밖에 없다. * 중국 귀속에 대한 불안감 - 여러 홍콩 영화 배우나 제작 인력들이 중국 귀속을 전후한 시기에 홍콩을 떠났는데, 정치적인 문제도 있었고 경제적 문제도 있었다.[* [[오우삼]]이나 [[서극]]은 정치적 문제 때문이라기보다는 각각 자기 집까지 저당잡혀 만든 [[첩혈가두]]나 [[영웅본색 3]]가 대실패한 후, 더이상 홍콩에서 영화를 만들기 힘들어서 그런 측면이 많다.] 1990년대 초반부터 영국을 포함한 영미권 국가에 영주권을 얻은 홍콩배우들이 전체의 80% 이상을 차지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는 중국 치하에서 창작의 자유가 보장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외국으로의 진출은 홍콩 영화가 위의 이유로 몰락한 이후인 1990년대 이후 발생한 일이다. 투자가 저조하고 작품 활동이 원할치 못하니 다른 나라로 간 것이다.[* 그래서 과거 홍콩 스타들의 프로필을 보면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하지만 해외로 진출한 이들 중 제대로 성공한 이는 원래부터 '''영어 연기가 되는 여배우'''인 [[양자경]] 정도였고[* 양자경은 말레이시아 상류층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영어로 교육을 받았고 영국 유학까지 해서 영어에 유창했기 때문에(오히려 배우 경력 초기에는 보통화나 광동어 등 중국어를 못 해서 대사가 많지 않으면서 대신 몸을 쓰는 액션영화에 출연했다), 할리우드에 진출하기에 유리했다. 또한 그 시대 여배우 중 드물게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해내는 배우라는 희소성이 있어서 할리우드에 안착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언어 장벽이나 인종차별에 부딪혀서 대부분 2000년대 중반에 중국영화판으로 전직한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동양계 남자의 배역은 섹스어필이 없는 무술계 스테레오타입이나 우스꽝스러운 단역 정도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적어도 홍콩배우들의 홍콩이탈이 이어지던 1990년대에는 절대로 할리우드에 안착할 수 없었다. 사실 할리우드의 동양계 차별은 뿌리가 깊다. [[Hawaii Five-O]]의 주역인 한국계 [[대니얼 대 김]]과 [[그레이스 박]]이 모두 시즌 6에서 캐스팅 차별(같은 드라마에 출연한 백인 동료 배우들에 비해 출연료를 적게 받았음)을 이유로 하차했는데, 이것이 불과 몇 년 전인 2010년대 후반에 생긴 일이다. 그러니 홍콩 영화인들이 미국 진출을 시도했던 1990년대에는 할리우드가 이들에게 훨씬 배타적이었다.] [[주윤발]]은 《[[리플레이스먼트 킬러]]》나 《[[커럽터]]》에서 동양계 미국인 캐릭터를 맡았지만 거의 비슷한 스타일로 일관했고, 결국 희대의 망작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을 끝으로 할리우드 영화는 손절하고 중국에서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성룡]]도 무술실력을 갖춘 동양계 코미디언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돌다가[* 예외적으로 《[[더 포리너]]》는 심각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만 이 영화의 제작사는 중국계 완다필름이다.] 중국에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다. 감독(서극, 오우삼 등)들은 인종이나 언어 등 겉으로 보이는 면에 있어서 배우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덜 받는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런 감독들조차 할리우드에서 몇몇 작품으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할리우드에 자리잡는데 실패하고 홍콩으로 돌아가게 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미 홍콩 영화계는 막대한 자본과 시장으로 이루어진 중국 본토 영화계에 흡수되어 있었고, 홍콩으로 복귀한 이들은 주윤발이나 성룡처럼 홍콩영화 대신 중국영화를 제작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간다. * [[규모의 경제]]의 단점을 보완하지 못한 시장의 협소함 - 홍콩의 인구는 약 750만이다. 2000년대 이전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 영화는 1인당 GDP도 높고, 영국 문화가 공존하는 특수성 때문에 시장 규모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중화권]](중국 본토 제외[*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에서 세련됐다는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홍콩은 독자 문화를 배양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좁아서 자생력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특히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독재정권 붕괴와 대중문화 성장으로 인해 시장 진입이 예전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또한 홍콩 문화의 기반인 [[광동어]]는 번역이 바로 되기 어려운데다 중국은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규제를 받기 때문에 더 클 수가 없었다. 홍콩인의 국외 이주 붐은 처음에는 중국 지배의 공포 때문에, 나중에는 더욱 큰 중국 시장에 대한 기대 때문으로, 이는 근본적으로는 홍콩 시장의 한계 때문이다. * 선매방식 도입 - 홍콩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되면서 홍콩영화 자체 시장만으로 제작비를 건지기 힘들게 되자, [[중화권]](중국 본토 제외[*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의 극장 업자들로부터 사전에 제작비용을 충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위에서 언급한 아류작들이 극심하게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홍콩보다는 돈을 미리 주는 [[중화권]] 시장(중국 본토 제외[*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을 우선적으로 겨냥하면서 홍콩 관객들이 홍콩 영화로부터 멀어져가는 결과를 낳았다. * [[한국 영화|한국 영화계]]의 세대 교체에 따른 개혁과 발전 - 중국에서 홍콩을 포함한 서방 영화가 수입금지되던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은 홍콩 영화의 최대 해외 시장이었다.''' [[이소룡]]이나 [[성룡]] 정도를 제외하면, 일본에서 홍콩 영화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일본은 [[찬바라]] 영화라고 불리던 고유의 사무라이 칼싸움 영화가 있기 때문에 중국식 무협 영화는 발을 붙일 수 없었고, 일본 영화 자체도 1960년대-1980년대에는 황금기였기 때문에, 홍콩 영화가 힘을 쓸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시장은 1980년대 홍콩의 제1 외국 시장이었고, 당연히 홍콩 영화계는 한국을 굉장히 의식하면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한국 시장에서 홍콩 영화의 위상이 퇴색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한국은 [[개발도상국]] 취급을 받고 할리우드 영화를 저렴한 가격으로 싸게 수입해 왔으나, 미국 영화계가 한국 영화 시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면서 영화 가격을 크게 올렸고 이후 직배급까지 시도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한동안 한국의 영화 수입 배급사들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홍콩 영화를 다량 수입해서 극장에 내걸게 되었고[* 하지만, 홍콩영화들도 흥행작 속편을 두고 수입사들이 값을 서로 올리는 경쟁을 하여 언론으로 두들겨 맞았다. [[황비홍]]이 대표적으로 56만 달러에 사온 황비홍 2는 경쟁으로 200만 달러 이상으로 값이 올라갔는데 당시 할리우드 대작급 수입가랑 맞먹는 액수였다. 정작 황비홍 2 흥행은 기대 이하였고 욕먹어가며 비싼 돈 주고 수입한 업체는 몇 해 안가 망해 문닫았다.], 이는 1980년대 후반 한국에서의 홍콩 영화 붐에 일조했다. 또한 직배영화에 대한 반발로 인한 영화계의 갈등으로 할리우드 영화 수입 및 상영에 일종의 공백이 생겼다. 할리우드에서 제작한 유명 영화의 수입이 늦어지고, 수입된 이후에도 직배사와 기존 수입사와의 갈등으로 상영 시기가 늦어지고, 영화관에서도 국내 영화계나 반미 시위대 눈치를 보는 바람에 상영을 꺼렸는데,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10527/37566938/5|한국 영화인 측에서 직배영화 상영관에 뱀을 풀어놓고 스크린에 테러를 가하기도 했었다]]. 이 공백을 홍콩 영화가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서울 올림픽 이후로 한국이 존재감을 드러내 보이며 1990대에 들어서면서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상품성이 좋은 할리우드 영화를 제때 사올 수 있게 되었고, 덩달아 한국 영화계 자체적으로도 개혁 분위기가 태동했으며[* 외국영화 상영관에 테러나 하는 구태의연한 방식 말고, 실력으로 맞서서 승부하자는 의식이 높아졌다.], 영화계 세대 교체에 따른 재능있는 영화인들도 점차 데뷔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과거 6~8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던 과거 영화인 세대가 본격적으로 퇴장하기 시작했고, 8~90년대 가정용 비디오 보급 붐을 타고 어릴 때부터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 작품을 공부하고 경험한 신세대 영화인들과 독재 정권 시기 창작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억눌려 있던 창작자들이 87년 민주화 이후 대중문화 해금 분위기에 힘입어 조금씩 문화계의 신진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계의 구세력과 신세력이 본격적으로 제대로 크게 부딪힌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이었고, 이게 대형사건으로 발전하여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졌던 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1996년 제34회 대종상에서의 이른바 [[애니깽 사태]]이다.] 특히 과거 영화인들이 '주먹구구식 + 도제식'으로 영화를 배우고 제작했던 것에 비해, 새로 등장한 영화인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와 여러 대학의 [[영화영상학과|연극영화학과]]를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국제적인 감각으로 영화 교육을 받은 새로운 인재들이었다. 이들이 이미 1980년대부터 서서히 연극 및 영화계에 진출하여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문화적 전환의 토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또한 1993년 [[문민정부]] 출범 및 1996년 [[헌법재판소]]의 영화 사전 검열 위헌 결정에 따른 창작 자율성 보장 이후부터는 영화 제작에 대한 운신의 폭이 그야말로 급속도로 넓어졌고, 결정적으로 1997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부터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 정책에 관한 모토가 자리잡게 되어, 2000년대의 이른바 [[한국 영화/역사#s-7|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기틀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특히 90년대 후반부터는 과거 지방 흥행업자나 소수 극장 업자들이 영화계의 제작과 배급을 좌지우지 하던 과거 분위기에서 벗어나, 점점 거대 기업의 영상 사업 부문이나 국제적 시각을 갖춘 영화 제작사와 투자 배급사 간의 경쟁 위주로 영화 제작 형태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금융계나 벤처 캐피탈 업계의 영화 산업 투자 체계화 움직임이 점차 일어나기 시작한 것도 1990년대 중반부터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은 IMF 사태를 겪으며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한국 경제가 빠르게 경제 위기에서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불어 영화 산업의 전면적 개편과 구조조정까지 급속히 이뤄지는 효과까지 가져왔다. 이렇듯 영화계의 산업적 토대가 뒷받침되면서, 결과적으로 영화 산업의 체계화 및 성장에 따라 투자와 수익의 선순환 구조를 이루게 되었고, 양적 질적 향상까지 이루게 되어 한국 영화의 작품성과 상업성이 높아졌으며, 이에 따라 한국 영화 관객들의 눈도 급속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류작이 난립하며 영화의 전반적인 품질이 나빠진 홍콩 영화에 대한 유행이 한국 시장에서 급격히 식어버렸다. 홍콩 영화계 입장에서는 거대한 시장을 하나 잃어버린 것이다. * 대만 내에서의 점유율 급감 - 대만은 한국과 더불어 홍콩 영화계의 최대 시장이었다. 대만에서는 한창 [[스크린 쿼터제]]가 적용되었을때도 홍콩 영화는 자국 영화로 인정받아서 스크린쿼터제에서 면제대상이었다. 거기에다가 [[대만 영화]]계와의 합작도 매우 활발했지만, 1992년에 홍콩 영화의 표값을 50%씩이나 인상하면서 관객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홍콩 영화의 상영횟수가 크게 줄어들면서 대만 시장내에서의 점유율이 급감하고 말았다. 뒤늦게 홍콩 영화의 수입가를 내렸지만 이때는 홍콩 영화 자체의 질적 저하로 대만 관객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대만에서의 홍콩 영화 입지가 크게 흔들린 일은 인재 유출 및 아류작 난립과 더불어 홍콩 영화 쇠락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 중국 본토 영화 성장 - 2010년대 두드러진 경향은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 대륙 영화계로 진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국 본토 영화는 여러가지 소재 제약도 있고 검열도 심하여 홍콩만큼 자유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단점이 있다.[* 예를 들어 《[[영웅본색]]》 같은 작품은 범죄 조직원들의 우정을 [[의리]]로 미화했기 때문에 죽었다 깨어나도 본토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이밖에도 에로물인 《[[옥보단]]》이나 초자연적 존재(유령)를 다루는 《[[천녀유혼]]》 같은 작품, 그밖에 항일 조직을 찌질하게 묘사한 《[[색계]]》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협이나 사극 및 로맨틱 코미디물은 검열 당국의 가위질을 피해갈 수 있는 데다가 대륙 영화에 들어가는 자본이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홍콩 영화계의 인재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스탭들은 물론이고, 광동어로 연기를 하던 주윤발이나 유덕화 같은 여러 홍콩 배우들도 현재는 보통화로 연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주윤발은 현재 대륙에서 활동할 수 없다.] 그러니 대륙 시장을 의식해야 하는 신세가 된 홍콩 영화계에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한 대작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중국/문화 검열]][* 현재 중국 대중 문화가 [[한류]]와 같은 국제적 유행세를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국 국내에서는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며 성장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현지를 가보거나 중화권 언론 매체를 보면 중국 대륙 자체의 대중문화가 점점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알 수 있다. 검열 때문에 성장 속도가 늦춰지고 있기는 하지만 성장 자체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무엇보다 중국 영화시장이 무척 크다 보니 검열받지 않는 식상한 소재로 만들어도 적어도 제작비는 회수할 수 있으며, 애국주의 영화 같은 것은 오히려 정부에서도 관람을 권장하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특수효과 등이 받쳐주기만 한다면 시장의 크기만큼이나 대박을 터뜨릴수 있다.] 때문에 영화가 성장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맞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일반적으로 검열제도가 창작 의욕 및 영화 산업 전반을 억누르고 영화의 예술적 다양성을 줄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현대 영화 기법 중 여러 가지를 창시했고 소련 영화의 황금기를 만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은 스탈린 시절에 활동하던 사람이다. 그의 작품 여럿이 상영금지를 맞곤 했지만, 스탈린 시절 및 그 이후 소련 영화계의 인프라가 튼실해지고 여러 걸작을 내놓은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5세대 거장 감독들은 [[문화대혁명]] 시절 청년기를 보낸 사람들이며, 이들이 만든 명작들은 대부분 지금보다 검열이 극심했을 때인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나왔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군사독재가 막 태동하던 1960년대 반짝 황금기를 맞은 이후 반공법 등 창작 제약으로 인해 한국 영화가 몇 십 년동안 맥을 못 추며 싸구려 저질 영화들이 잔뜩 만들어지던 때도 있었다. 따라서 "검열 때문에 영화가 성장하지 못했다.", "아니다. 검열 때문에 괜찮은 작품들이 나왔다." 식의 이분법적인 논리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억압으로 인해 다양성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척박한 환경에서 오히려 영웅이 나오듯 걸작이 나오는 경우도 간혹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검열이 극심할 때인 1990년대 [[천카이거]]나 [[장이머우]] 같은 거장들이 각각 《[[패왕별희]]》나 《[[인생]]》 같은 걸작을 내놓았던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자본시장이 커지면서 현재 사극 같은 경우는 거의 할리우드급으로 돈을 투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중국 영화시장의 규모는 2015년 세계 2위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성장하는 중이다. 이렇게 대자본이 굴러가기 시작하자 상업적으로 대흥행하면서 괜찮은 작품이 나오고 있다.[* 중국영화에서 다룰 수 없는 영역은 선정성과 정치성이다. 그런데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는 액션, 코미디나 SF같은 영화들은 이런 주제들을 피해갈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심한 중국에서도 계속 흥행작이 나오고 있다. 다만, 중국 프로파간다 식의 내용들이 첨가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어느 나라든 검열 대상 소재는 대충 정해져 있고, 영화판에 오래 있다 보면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정치적, 사회적 민감한 내용이 없는 순수 오락영화 같으면 대부분 검열을 통과하는데, 검열이 강한 경우라면 그 검열을 통과한 경우는 반대급부로 상영관을 독점, 큰 수익을 볼 수도 있다. ~~심지어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영화 같으면 국가권력이 홍보나 관객몰이까지 해 준다.~~ 수익성만 좋다면 영화는 만들어지고 영화판에 자본이 투입되며 당연 여기에는 우수한 영화 인재들을 필요로 한다. 공산당 홍보물 같은 영화라도 개런티만 많이 준다면 출연을 마다할 리 없다. 특히 화면에 얼굴이 안 나오는 제작 스텝들이라면 더 말할나위 없다. 주연급 배우라면 이미지 문제상 거절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공산당 홍보 영화에 홍콩영화배우들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목격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홍콩이나 대만의 엔터테인먼트계가 무너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유능한 제작 스텝들이나 PD들이 보따리 싸고 대륙으로 들어간 탓이 크다. 엔터테인먼트는 연예인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아니다.][* 하지만 왕정 감독 등 일부 홍콩의 거대 제작자들이 수준미달의 영화들을 계속 제작하다 보니 대륙 관객들도 식상함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중국 영화시장의 규모 때문에 이제는 홍콩뿐만 아니라 할리우드까지 간혹 중국 눈치를 보는 형편이다. 중국에서 돈을 벌고 싶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인데, 예를 들어 《[[월드워Z]]》에서 처음에는 전염병 발병지를 중국으로 설정했다가 중국에서 수출금지 처분을 받게 될까봐 급하게 북한으로 변경[*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결국 중국에선 개봉금지당해 헛된 노력이 되었고 한국에서 어거지로 북한으로 변경했다고 비난을 받았다. 정작, 한국에서 해외 흥행 1위를 해버렸다.]했고 《[[그래비티(영화)|그래비티]]》에서는 중국의 위성파괴 때문에 재난이 벌어진다는 설정을 러시아 때문이라는 것으로 바꾸었다. 러시아도 [[동성애]] 등 일부 소재를 검열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중국보다는 훨씬 관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도 수준미달의 작품들이 끝없이 양산되고, 2019년 [[홍콩 민주화운동]] 이후로 젊은 홍콩 영화 제작진들이 약진을 거듭하기 시작하여 2020년 들어서 좋은 작품들이 하나 둘 씩 제작되어 존재감을 조금씩 드러내고는 있지만 브랜드가치가 제로가 되어버려 이를 알아주는 이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대만 같은 동아시아의 일부 매니아층에만 국한될 뿐이다. * 영화인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지나갈 조짐이 보이자 홍콩 내부의 자금이 유출되기 시작하면서 영화계 자체의 큰 돈줄이 마르게 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대만을 비롯한 중화권 국가(중국 본토 제외[*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 이전])로부터 주로 소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홍콩 영화인들에 대한 처우가 급속도로 열악해지기 시작한다. 영화가 저예산이나 소자본으로 제작되다 보니 영화의 소재 또한 돈이 될 만한 안전한 것 위주로 확고히 재편됐으며, 결정적으로 영화 제작 스태프들의 급료가 199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반토박 수준이 났다. 홍콩 영화인들이 중국 영화 쪽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아예 영화계를 떠나버리는 일이 벌어졌고, 90년대에 다작출연에 지쳐버린데다 중국에 반환되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불안감에 휩싸인 상당수 홍콩 배우들은 영주권을 얻어 홍콩을 떠나거나 이중국적을 취하게 되면서 영화판이 텅 비어버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보다는 '안정'을 원하는 영화판의 행태로 새롭고 재능있는 인재의 수급 또한 씨가 마르기 시작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우 연령층(특히 남자 주연급 배우)이 갈수록 고령화가 되어가고 세대교체가 잘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일부 스타급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과 배우 전문 육성 기관 부재 - 한국에서는 이부분은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지만, 홍콩 영화 몰락의 가장 큰 문제들 중 하나였다. 일부 영화팬들이 항상 홍콩영화의 몰락의 원인으로 드는 중국만 치더라도 예술을 선전도구로 보는 사회주의 국가 성향상 건국 직후부터 체계적으로 인력을 양성하는 영화, 연기학교가 설립되어 연기력 갖춘 여러 배우나 연출력있는 감독을 양성했으나, 홍콩은 연기나 영화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학교가 전성기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TVB나 ATV 등의 방송국에서 전속 탤런트를 양성하기 위한 연습생 시스템이 있었고 홍콩의 레전드급 (남)배우들 대부분은 여기 출신이다.] 홍콩 영화가 인기를 끌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영국령 시절 창작의 자유로 다양한 장르를 제작할 수 있었던데다 남녀배우 불문하고 예쁘고 매력적인 배우들이 아시아 배우들 중에서 가장 많아 그들의 이미지로 승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홍콩 배우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연기자들 상당수가 아이돌, 가수나 미녀대회[* 특히 여성 연기자들은 대만출신을 제외하면 거의 예외 없이 미스홍콩 출신이었다. 이 미녀 대회 출신들의 상당수는 진지한 연기보다는 연예계에서 뜨면 재벌과 결혼하여 신분상승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았고, 실제로 탑레벨의 여배우들이 대부분 이 경로로 은퇴했다. 다만 [[양자경]]은 이런 사모님 노릇을 2년 정도 하다가 이혼후 복귀, 2023년에는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할 정도로 홍콩 출신 배우 중에서는 글로벌하게 가장 성공했다.] 출신이기 때문에''' 몇몇 레전드급 예외를 제외하면[* 허관걸, 장국영] 연기력이 형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홍콩 배우들 중에서 연기력이 출중하여 본토 및 대만 배우와 연기력으로 정면 승부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았다. 그리고 홍콩 영화 배우 대부분은 가수 활동과 병행하는 멀티 엔터테이너로 활동한데다 유명 배우들은 연간 10편 이상의 겹치기 출연을 했기 때문에 배역 연구나 연기 분석이 사전에 제대로 이뤄질리도 없었고 겹치기로 출연하는 영화들조차 특정 배우의 이미지 울궈먹기에 불과했다. 홍콩 영화 전성기에 [[TVB]]나 [[ATV]]같이 방송국 공채시스템 외에 배우를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교육기관이 전무했다는 점도 문제점 중 하나였다. (홍콩 최초의 배우 전문 교육기관은 90년대 후반에 생겼다.) 반면, 중국 대륙은 오래전부터 [[중앙희극학원]], [[북경전영학원]] 같이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관이 있었고 이 곳에서 수많은 배우들을 배출했다. 이렇다보니 홍콩 반환 이후 대륙에서 본격적으로 홍콩 영화가 알려지면서 연기력으로 비난받는 배우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광둥어로만 연기하다가 직접 보통화로 연기해야 하는 상황까지 생기다보니 여기서 기본기가 들통나는 배우들도 생겼다. 이후 2002년 《[[무간도]]》를 시작으로 8~90년대의 홍콩영화스러운 느와르가 부활하긴 했지만, 몇몇 시리즈에 국한된 상황이라 홍콩 영화계의 판도를 바꿀만한 폭발적인 현상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한국·싱가포르·대만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도 홍콩 영화에 대해 유달리 열광[* 오죽하면 [[왕가위]] 감독이 홍콩 느와르란 말에 거부감을 보이면서 1990년 영화지 로드쇼 인터뷰에서 한국 시장이 중요하다보니 홍콩 영화가 한국인 관객들의 눈치를 본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황비홍]]》은 1편이 대박을 치자 수입사들끼리 2편 경쟁이 붙어 수입가가 4배 가까이 오르는 등 언론에서도 비판할 정도였다.]했으나 그 후 한국·싱가포르·대만 관객에게도 외면을 받다가 왕가위 감독 위주로 찬양 받고 있다. 심지어 2013년도 영화 《[[일대종사]]》의 경우에는 감독이 [[왕가위]]이며 주연배우들이 [[양조위]], [[장쯔이]], [[송혜교]]라는 스타급들이건만, CJ 무비꼴라쥬 배급을 통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421&aid=0000442683|다양성 영화]] 취급(...)을 받으며 개봉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근데 이건 왕가위가 퇴물이 된 점도 있다~~ 참고로 다양성 영화란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같은 저예산 비주류 영화를 말한다.[* 사실 예술영화, 다큐영화 역시 독립영화의 범주안에 들어가는 것이기는 하나, 정치적 논리가 들어가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다.] 그래도 [[무간도]]나 [[흑사회(영화)|흑사회]]나 [[콜드 워]]나 [[뉴 폴리스 스토리]] 같은 범죄물과, 구화영웅(救火英雄) 같은 재난물로 명맥을 잇고 있으며 이 중 무간도는 2016년 봄 재상영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장르인 홍콩식 호러에도 도전하여 '디 아이즈(The eyes)'나 '이도공간', 헐리우드 메이져 영화사와 대만과의 합작으로 제작된 '더블 비전(雙瞳)' 등의 작품이 나왔다. 이도공간은 [[장국영]]의 [[유작]]이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